도미타 잇파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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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타 잇파쿠는 오미 국 출신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외교 사절로 활약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고베 성을 방어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었다. 2만 155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조선 출병에 종군하고 히데쓰구 할복 사건 이후 고봉행의 직무를 대행했다. 다도에 조예가 깊었고, 히데요시 사후에는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게이초 4년(1599년)에 은거 후 사망하여 난젠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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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타 잇파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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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씨명 | 도미타 씨 |
이름 | 도미타 잇파쿠 |
원 이름 | 도미타 도모노부 |
다른 이름 | 도모노부 노부히로 (노부히로) 나가이에 잇파쿠 스이사이 |
통칭 | 헤이우에몬 사콘노쇼겐 |
호 | 잇파쿠 스이사이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게이초 4년 10월 28일 (1599년12월 15일) |
계명 | 쇼간인덴 코운 스이사이 다이코지 |
묘소 | 난젠지 즈이운안 |
관위 | 종5위 하사콘노쇼겐 |
섬긴 주군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
씨족 | 도미타 씨 |
부모 | 아버지: 도미타 스케토모 |
배우자 | 정실: 구로다 히사쓰나의 딸 |
자녀 | 노부타카 다카사다 (구라도) 렌이치 헤이스케 사노 노부요시 딸 (곤도 가쓰토시의 부인) |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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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력
도미타 씨는 우다 겐지 사사키 씨의 서류로, 동족인 이즈모 슈고쿄고쿠 씨의 가신이었다. 잇파쿠의 할아버지인 시게토모가 아마고 쓰네히사에게 도다 성을 빼앗겨 몰락하고, 쿄고쿠 씨와 마찬가지로 오미 국으로 도망쳤다.
쓰다 소우큐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최한 다회에 여러 차례 초대되는 등 다도에 조예가 깊었다. 히데요시 측근으로서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자주 맡았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신임을 얻었던 문화인이자 다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데요시 사후, 잇파쿠는 히데요시를 기리며 가노파의 화가에게 히데요시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이는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로서 우와지마 다테 문화 보존회에 소장되어 있다. 잇파쿠는 같은 오미 출신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도미타 잇파쿠는 오미 국에서 태어났다. 본관지는 오미 국 아사이 군도다 장으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덴쇼 원년 (1573년) 나가시마 잇코잇키에서의 치구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덴쇼 10년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섬겼다.
덴쇼 12년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는 이세 고베 성 (또는 기조 성)을 방어했다. 카니에 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쳐 온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의심하여 입성을 거부하고 내쫓았다. 전쟁 후에는 히데요시의 외교 사절로 활약하여 11월, 구와나 성에 파견되어 오다 노부오와의 화의의 본사로 임무를 수행한 공으로 명마 호시자키를 하사받았다. 이어서 도쿠가와 가에게도 사자가 되어 오다 노부오 가신의 다키가와 가쓰토시를 데리고 하마마쓰 성을 방문하여 이에야스의 차남·오기마루(유우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데려왔다. 같은 해, 종5위 하사콘노 쇼겐에 서임되었다.
덴쇼 14년 (1586년) 5월, 히데요시의 여동생인 아사히 히메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결혼이 성립되자, 아사노 나가마사와 함께 가마를 메고 하마마쓰 성으로 가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어규식의 봉행을 맡아 이에야스에게 술잔을 받았다. 귀국 후, 히데요시로부터 사바오의 투구·갑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덴쇼 15년 (1587년) 규슈 출병에 종군했다.
덴쇼 17년 (1589년) 7월에 사나다 씨의 영토였던 누마타 성을 오다와라 호조 씨에게 인도할 때, 쓰다 노부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입회했다. 10월에는 오다와라 정벌의 계기가 된 나구루미 성 쟁탈전에서의 호조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에 대한 문책과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쓰다 노부카쓰와 함께 맡았으며, 전쟁 후에는 중개역을 맡아 다테 마사무네와의 오슈 시오키에 관한 협상에 임했다.
덴쇼 18년 (1590년) 전쟁 후 9월 7일, 우에야마 성을 하사받고, 오미, 미노 국 내에서 1만 65석을 가증받아 2만 155석이 되었다. 같은 해,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덴쇼 19년 (1591년) 윤정월 16일에 미노 국 이케다 군 내에서 8,010석을 가증받았고, 4월 26일에도 오미 국 가모 군 내에서 9,107석을 가증받았다.
분로쿠 원년 (1592년) 조선 출병에 종군하여, 히데요시 본진의 전비중의 필두로서 650명을 이끌고 나고야 성에 있었다. 그 후, 동역의 가나모리 나가치카·가즈시게와 함께 1,300명을 이끌고 도해했다. 귀국 후, 분로쿠 3년 (1594년)의 후시미 성 축성을 분담했다.
분로쿠 4년 (1595년) 2월 28일, 2만 석을 가증받았는데, 이는 적남 노부타카에게 분지했다. 5월 16일, 이세 국 아키 군 시라코 촌에 2천 석을 가증받았다.
히데쓰구 할복 사건으로 아사노 나가마사가 근신을 명받았을 때 고봉행의 직무를 대행했다. 사건 관여에 대해 세야쿠인 젠슈·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다테 마사무네를 심문했다. 7월 15일, 이러한 공로로 오다 노부카네의 몰수령인 이세 안노쓰 성주 6만 석 (5만 석이라고도 함)으로 이봉되었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오토기슈가 되어, 게이초 3년 (1598년)의 히데요시의 죽음에 즈음하여 유물 금 30매를 수령했다.
게이초 4년 (1599년)에 은거하여 스이세이(水西)라고 칭했다. 같은 해 10월에 사망. 교토 난젠지의 즈이운안에 묻혔다. 노부타카가 뒤를 이었다.
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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